성공과 실패를 결정하는 것은
신과 인간 중 어느 쪽일까?
▷ 한동원 <나의 점집 문화 답사기> 中
지금도 계속 그르릉 끓고 있는 이 목상태의 원인이 된 꽤 심한 감기를 앓은 겨울이였다. 떨어질 듯 떨어지지 않는 기침님을 모시고 간 크리스마스 트리의 전구가 반짝이는 치킨집에서 맥주를 한 잔 하면서 스치듯 '라이프 오브 파이'애 대한 감상을 처음 들었었다. 얼마 후 다른 이의 또 다른 감상을 들을 기회가 생겼다. 그가 말한 내용이 정확히 기억나진 않는다. 꽤 훌륭한 영화다, 감독이 대단하다며 주인공이 백인이 아니어서 관심을 조금 덜 받는 걸지도 모르겠다 라는 조심스런 의견을 피력했던 것 같기도 하다. 상당한 존경의 의미를 담은 표정으로 말했던 탓인지 인상깊었던 영화 후기였다. 그 후 도서관을 갔을 때 이 책을 찾아 본 계기가 그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얼마 전 중고서점에 가서 책들을 훑어 보다가 이 책을 발견하고 문득 그 겨울이 떠울랐고 다시 읽고 싶단 생각이 들어서 집어 들고 왔다. 이야기는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뉜다. 소년시절의 파이, 난파되어 항해하는 파이, 그리고 중년의 파이. 각 챕터가 넘어가면서 다른 장르의 이야기인양 분위기가 바뀌었다. 일상, 모험, 스릴러.. 그리고 전체를 관통하는 분위기 속엔 항상 신이 존재했다. 아직까지도 영화를 보진 못했지만 영화화 하면서 파이가 왜 백인으로 바뀌지 않고 원작대로 인도 소년이어야 했는지는 알 것도 같았다.
책을 다시 읽고 싶다고 생각했던건 망망대해를 표류하던 227일간의 항해일지를 다시 들여다 보고 싶어서였다. 실로 절망과 공포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야 할 상황었다. 그러나 파이가 기록한 항해는 조금은 밝고 유쾌했다. 그 부분이었다. 검고 깊고 매서운 바다가 아니라 투명하고 나른하고 평화로운 이미지로 다가왔던 그 바다 말이다. 어떻게 고독 속을 탈출했는가가 아닌 어떻게 고독을 견디었는가가 다시 보고 싶어졌던 것 같다. 그러나 다시 파이를 따라 떠난 길은 그다지 밝지만은 않았다. 치열한 생존의 몸부림 속에 있던 그의 인상적인 긍정의 부분만을 기억했던 건가 싶기도 했다. 역시 기억이란 그 때의 상황과 감정에 속박되어 있는 존재인가 보다.
파이가 겪었던 일들이 사실인지,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무엇이 진실인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거대한 바다. 망망대해 속에서 단지 시간이 흐른다고 배가 알아서 육지로 가진 않는다. 하지만 우선은 견디어 내야 한다. 견디어 내는 시간이 있었다. 그렇게 우리 모두는 살아 간다.